저지대 원두와 고지대 원두, 고도가 맛에 남기는 흔적

저지대 원두와 고지대 원두, 고도가 맛에 남기는 흔적
봉투 뒤 ‘1,800m’을 그냥 넘긴 적 없나요
원두 봉투를 뒤집으면 산지와 품종 옆에 작게 적힌 숫자가 하나 보여요. 1,200m, 1,800m 같은 재배 고도요. 저도 한동안은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런데 같은 미디엄 로스팅인데도 어떤 원두는 산미가 또렷하고, 어떤 건 뭉근하게 둥근 이유를 파고들다 보니 결국 이 숫자로 돌아오게 되더라고요. 고도는 생각보다 컵 안에 또렷한 흔적을 남깁니다.
높은 곳일수록 콩이 천천히 여뭅니다
커피나무는 열매를 맺고, 그 씨앗이 우리가 아는 생두예요. 고도가 높아지면 기온이 낮아지고, 특히 밤낮의 기온 차가 커집니다. 추운 밤에는 열매가 익는 속도가 느려져요. 사과를 떠올리면 쉬워요. 서늘한 지역에서 천천히 자란 사과가 과육이 단단하고 당도가 야무진 것처럼, 고지대에서 천천히 여문 커피 열매도 씨앗 안에 당분과 향미 성분을 촘촘하게 쌓습니다.
그래서 고지대 생두는 밀도가 높습니다. 손에 쥐면 묵직하고, 로스팅할 때도 열을 더 버티는 편이에요. 반대로 저지대는 따뜻해서 열매가 빠르게 익습니다. 빨리 자란 만큼 조직이 무르고, 밀도도 상대적으로 낮은 경우가 많아요. 같은 콩이라도 자란 높이에 따라 출발선이 다른 셈입니다.
고도가 컵에 남기는 흔적
이 밀도 차이가 맛으로 이어집니다. 고지대 원두의 가장 큰 특징은 또렷한 산미예요. 여기서 산미는 시큼함이 아니라, 잘 익은 과일이나 감귤류를 베어 물 때의 상큼함에 가깝습니다. 단맛도 더 복합적이고, 마시고 난 뒤 여운이 길게 이어지는 경우가 많아요. 이런 원두는 봉투에 SHB나 SHG 같은 표기가 붙기도 하는데, 단단하게 자란 콩이라는 등급 표시입니다.
저지대 원두는 반대로 산미가 얌전합니다. 대신 바디감이 묵직하고, 견과류나 초콜릿 같은 구수한 톤이 앞서요. 자극이 적어서 편하게 쭉 마시기 좋습니다. 어느 쪽이 정답이랄 건 없어요. 성격이 다를 뿐입니다.
그렇다고 저지대가 ‘아래’는 아닙니다
숫자가 크면 더 좋은 원두라고 오해하기 쉬운데, 절반만 맞는 말이에요. 고도는 품질 등급이 아니라 맛의 방향을 가리키는 표지판에 가깝습니다. 아침에 잠 깨우는 산뜻한 한 잔을 원한다면 고지대가 어울리고, 우유를 섞은 부드러운 라떼나 자극 없는 저녁 커피를 원한다면 저지대의 둥근 바디가 더 맞을 수 있어요. 무엇을 언제 마시고 싶은지가 먼저입니다.
참고로 우리가 마시는 원두는 대부분 수입산인데, 해마다 어느 정도 들어오는지는 관세청 커피 수입량 통계에서 추이를 확인할 수 있어요.
그래서 뭘 보면 될까
봉투를 살 때 고도 숫자 하나만 따로 보기보다, 산지·가공법과 함께 읽어보세요. 대략 1,500m를 넘어가면 산미와 향미가 도드라지는 쪽, 그 아래면 바디와 균형이 편안한 쪽이라고 감을 잡아두면 고르기가 쉬워집니다. 그리고 같은 고지대라도 추출 온도를 조금 낮추면 산미가 날카롭지 않게 정리돼요. 숫자를 알고 마시면, 어제와 같은 원두에서도 어제 못 느낀 결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더 알아보기
사진: Mark Daynes on Unsplash
함께 읽으면 좋은 글
이 주제가 처음이라면 원두, 산지에서 잔까지 맛이 이어지는 길에서 전체 글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