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마, 에스프레소 위 갈색 거품은 무엇으로 만들어질까

집에서 처음 에스프레소를 뽑아본 날, 잔 위에 뜬 황금빛 갈색 거품을 한참 들여다봤던 기억이 납니다. 이게 도대체 뭘까. 우유 거품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냥 물 위의 기포 같지도 않고. 두께가 손가락 반 마디쯤 되게 두툼하게 올라오면 괜히 뿌듯하고, 얇게 깔리기만 하면 뭔가 실패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 거품의 정체가 바로 크레마(crema)입니다. 이탈리아어로 ‘크림’이라는 뜻이죠. 오늘은 이 크레마가 무엇으로 만들어지는지, 그리고 두꺼운 크레마가 정말 맛있는 커피의 증거인지를 하나씩 풀어보려고 합니다.
크레마는 사실 ‘기름과 가스와 물’의 합작품입니다
크레마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미세한 거품 덩어리입니다. 그런데 이 거품을 만드는 재료가 조금 특별합니다.
에스프레소는 9바(bar) 안팎의 높은 압력으로 뜨거운 물을 원두 가루층에 밀어 넣어 뽑습니다. 이 과정에서 세 가지가 함께 빠져나옵니다. 원두 속의 기름 성분(오일), 로스팅 때 원두 안에 갇혀 있던 이산화탄소 가스, 그리고 물에 녹은 향미 성분들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압력입니다. 높은 압력 아래에서는 가스가 물에 억지로 눌려 녹아 있는 상태인데, 커피가 잔으로 떨어지면서 압력이 확 풀립니다. 탄산음료 병뚜껑을 열면 거품이 확 올라오는 것과 같은 원리예요. 눌려 있던 이산화탄소가 갑자기 자유로워지면서 무수히 많은 미세 기포를 만듭니다.
문제는 그냥 기포는 금방 터진다는 겁니다. 그런데 에스프레소에는 원두 기름과 물에 녹은 성분들이 함께 있어서, 이 기포들의 막을 붙잡아 줍니다. 비눗물이 있어야 비눗방울이 오래 유지되는 것과 비슷하죠. 그래서 커피 위에 촘촘하고 안정적인 거품층, 즉 크레마가 만들어지는 겁니다.
정리하면 크레마는 압력이 풀리며 터져 나온 가스 + 그 거품을 감싸 안정시키는 기름·향미 성분의 결과물입니다. 핸드드립 커피에 크레마가 없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압력을 주지 않으니 이런 폭발적인 기포가 생길 일이 없거든요.
크레마 색과 두께가 알려주는 것들
크레마를 자세히 보면 색이 균일하지 않습니다. 아래쪽은 진한 갈색, 위로 갈수록 옅은 황금빛에 얼룩덜룩한 무늬가 섞여 있곤 하죠. 이 색과 두께는 커피 상태에 대한 힌트를 줍니다.
가장 크게 작용하는 게 원두의 신선도입니다. 앞서 말했듯 크레마의 재료 중 하나가 원두 속 이산화탄소인데, 이 가스는 로스팅 직후 가장 많고 시간이 지날수록 서서히 빠져나갑니다. 그래서 볶은 지 얼마 안 된 신선한 원두일수록 크레마가 두껍고 풍성하게 올라옵니다. 반대로 오래돼 가스가 다 날아간 원두는 크레마가 얇거나 거의 생기지 않습니다. 신선도 관리가 왜 중요한지는 원두 보관과 가스 배출의 관점에서도 늘 이야기되는 부분이죠.
로스팅 정도도 영향을 줍니다. 강하게 볶은 원두는 기름이 표면으로 많이 배어나오고 가스도 활발해서 크레마가 진한 갈색으로 두껍게 나오는 편이고, 약하게 볶은 원두는 상대적으로 옅고 얇게 나옵니다. 그래서 색만 보고 “이게 더 맛있다"고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취향과 로스팅 방향이 다른 것뿐일 수 있으니까요.
분쇄도와 다지기(탬핑)도 크레마에 흔적을 남깁니다. 너무 굵게 갈거나 느슨하게 담으면 물이 후루룩 빠져나가면서 크레마가 옅고 큰 기포로 성기게 뜹니다. 반대로 적절히 저항이 걸리면 곱고 촘촘한 크레마가 안정적으로 올라옵니다.
‘두꺼운 크레마 = 좋은 커피’라는 오해
여기서 많은 분들이 오해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크레마가 두껍고 진할수록 무조건 좋은 커피라는 생각이요. 절반만 맞습니다.
크레마가 신선도와 추출 상태를 어느 정도 반영하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크레마 자체가 유난히 두껍게 나오도록 만드는 방법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로부스타 원두를 섞는 겁니다. 로부스타는 아라비카보다 가스와 특정 성분이 많아 크레마가 훨씬 두껍게 나오는데, 그렇다고 향미까지 더 좋은 건 아닙니다. 두께만 보고 판단하면 놓치는 게 생기는 이유입니다.
게다가 크레마의 맛 자체는 꽤 씁쓸하고 자극적인 편입니다. 향미 성분과 기름이 농축된 층이라 향은 좋지만, 맛만 따지면 커피의 쓴맛을 응축해 놓은 부분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마시기 전에 살짝 저어 아래 커피와 섞어주면 향은 살리면서 쓴맛은 눅여줄 수 있습니다.
결국 크레마는 커피의 상태를 읽는 ‘창문’ 정도로 보는 게 건강합니다. 두께에 집착하기보다, 곱고 균일하게 잘 유지되는지, 신선한 원두에서 자연스럽게 올라오는지를 보는 편이 훨씬 실용적이에요.
그래서 무엇을 기억하면 될까
처음 잔 위의 거품이 궁금했던 그날로 돌아가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크레마는 높은 압력이 풀리며 터져 나온 이산화탄소 기포를, 원두 기름과 향미 성분이 감싸 안정시킨 거품층입니다. 그래서 신선한 원두, 적절한 분쇄와 다지기, 제대로 걸린 압력이 함께 맞아떨어질 때 곱게 올라옵니다.
두께 하나로 커피의 등급을 매기려 들면 오히려 헷갈립니다. 크레마는 점수판이 아니라, 지금 내 원두와 추출이 어떤 상태인지 알려주는 신호에 가깝습니다. 다음에 에스프레소를 뽑을 때 그 갈색 거품을 한 번 더 유심히 들여다보면, 원두가 얼마나 신선한지 손끝으로 읽어내는 재미가 생길 겁니다.
더 알아보기
- 원두 신선도와 가스 배출이 궁금하다면, 로스팅 날짜 확인 습관부터 들여보시길 권합니다.
사진: Matt Hoffma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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