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포스트

핸드밀 분쇄, 클릭 수 메모가 필요한 이유

핸드밀 분쇄, 클릭 수 메모가 필요한 이유
핸드밀 분쇄, 클릭 수 메모가 필요한 이유

핸드밀 분쇄, 클릭 수 메모가 필요한 이유

솔직히 고백하자면, 제 첫 그라인더는 실패였습니다. 몇 년 전 커피에 막 재미를 붙였을 때, 인터넷에서 눈에 띄게 싸길래 별생각 없이 저가형 전동 분쇄기를 하나 샀습니다. 결과물이 균일하지 않아서 가루가 커졌다 작아졌다 제멋대로였고, 분쇄도를 조절하는 단계도 뭉툭해서 “어제랑 오늘 맛이 왜 이렇게 다르지?“를 매일 반복했습니다. 그때 배운 교훈은 하나였습니다. 분쇄가 흔들리면 나머지를 아무리 잘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

그래서 다음 도구는 좀 진지하게 골랐습니다. 결과적으로 손으로 돌리는 핸드밀, 그중에서도 원뿔형 날(코니컬 버)에 분쇄도가 클릭 방식으로 딱딱 걸리는 제품군을 택했습니다. 오늘은 이 핸드밀을 거의 2년 가까이 쓰면서 알게 된 것들, 특히 제가 “클릭 수 메모"라는 습관을 왜 들이게 됐는지를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왜 굳이 손으로 가는 걸 샀나

전동으로 데인 사람이 왜 더 불편한 수동을 골랐냐고요. 이유는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원두를 넣고 돌리는 만큼만 갈리니 소음이 거의 없어서 이른 아침이나 늦은 밤에도 부담이 없었습니다. 둘째, 예산 안에서 전동보다 수동 쪽이 날의 품질을 더 높게 가져갈 수 있었습니다. 셋째, 분쇄도를 딸깍딸깍 클릭으로 조절하는 구조라, 예전에 저를 괴롭혔던 “어중간한 눈금"의 애매함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첫인상: 손맛이 생각보다 좋았다

받자마자 원두를 넣고 돌려봤는데, 첫인상은 “생각보다 힘이 덜 든다"였습니다. 물론 다크로스팅 원두는 부드럽게 갈리고, 라이트로스팅은 확실히 뻑뻑해서 손목에 힘이 들어갔습니다. 그래도 하루 한두 잔 분량이면 부담스러운 수준은 아니었어요. 무엇보다 갈아낸 가루를 손가락으로 비벼봤을 때 굵기가 고른 게 느껴졌습니다. 저가형 시절의 그 들쭉날쭉함이 없었죠.

분쇄도 조절은 대개 손잡이 아래나 하단 다이얼을 돌려서 맞추는데, 한 칸씩 돌릴 때마다 “딸깍” 소리와 함께 걸리는 지점이 있습니다. 이게 바로 클릭입니다. 완전히 조인 상태(0클릭)에서 몇 클릭을 풀었느냐로 굵기가 정해지는 방식이라, 이론상으로는 재현이 쉬워 보였습니다.

몇 달 뒤에 알게 된 진짜 문제

문제는 두어 달 지나서 드러났습니다. 핸드드립은 20클릭 근처, 어쩌다 모카포트를 쓰면 더 곱게, 콜드브루를 담글 땐 훨씬 굵게. 이렇게 추출 방식마다 굵기를 바꿔가며 쓰다 보니, 어느 순간 “지금이 몇 클릭이었더라?“가 기억이 안 나기 시작했습니다.

수동 핸드밀은 전동처럼 현재 눈금이 화면에 뜨지 않습니다. 매번 완전히 조였다가 다시 세면서 풀어야 지금 몇 클릭인지 알 수 있어요. 그런데 이걸 매번 다시 세는 게 은근히 귀찮고, 대충 감으로 맞추면 어제의 그 맛이 재현이 안 됩니다. 저가형 시절과 똑같은 “왜 오늘 맛이 다르지"가 도구를 바꿨는데도 슬금슬금 돌아온 거죠.

그래서 시작한 클릭 수 메모

해결책은 허무할 만큼 단순했습니다. 냉장고 옆에 작은 메모를 붙여두고, 추출 방식별로 클릭 수를 적어둔 겁니다.

  • 핸드드립(V60 계열): 20~22클릭
  • 프렌치프레스: 28~30클릭
  • 모카포트: 10~12클릭

이렇게 적어두고, 원두를 바꿀 때마다 옆에 날짜와 한 줄 감상을 덧붙였습니다. “이번 에티오피아는 22클릭에서 조금 밍밍, 20클릭으로 내리니 딱.” 이런 식으로요. 메모를 하기 시작한 뒤로 커피 맛이 눈에 띄게 안정됐습니다. 재현이 되니까, 비로소 “실험"이 가능해졌거든요. 기준점이 있어야 한 클릭 조였을 때 뭐가 달라지는지 비교가 되니까요.

원두마다 최적 클릭이 조금씩 다른 것도 이 메모 덕에 체감했습니다. 같은 핸드드립이라도 라이트로스팅은 살짝 곱게, 다크로스팅은 살짝 굵게 가야 균형이 맞더라고요. 이 감각은 앞서 이야기한 가공 방식이나 로스팅 단계와도 연결됩니다. 결국 분쇄도는 원두의 성격에 맞춰 조율하는 변수라는 걸, 메모를 쌓으면서 몸으로 알게 됐습니다.

아쉬운 점도 분명히 있다

칭찬만 하긴 어렵습니다. 가장 아쉬운 건 역시 손이 든다는 점입니다. 라이트로스팅 원두를 두세 잔 분량 갈면 손목이 뻐근합니다. 손님이 왔을 때 여러 잔을 연달아 내리기엔 확실히 번거롭고, 이럴 땐 전동이 그리워집니다. 또 클릭 수를 매번 0점에서 다시 세야 하는 구조 자체는 여전히 불편합니다. 메모로 보완했을 뿐, 도구가 현재 값을 기억해주진 않으니까요. 청소도 분해해서 가루를 털어내야 해서, 게으른 날엔 미루게 됩니다.

지금도 쓰고 있고, 이런 분께 권합니다

그럼에도 이 핸드밀은 지금도 제 기본 그라인더입니다. 하루 한두 잔을 조용히 내려 마시고, 원두와 추출 방식을 이것저것 바꿔가며 맛의 변화를 즐기는 사람에게는 이만한 도구가 없다고 느낍니다. 반대로 아침마다 여러 잔을 빠르게 준비해야 하거나 손목 부담이 걱정되는 분이라면 전동 쪽을 권하고 싶습니다.

핵심만 남기면 이렇습니다. 수동이든 전동이든, 분쇄도는 반드시 기록해두세요. 감으로 맞춘 어제의 맛은 오늘 재현되지 않습니다. 작은 메모 한 장이 커피를 훨씬 덜 흔들리게 만들어줍니다.

사진: shraga kopstein on Unsplash

함께 읽으면 좋은 글

이 주제가 처음이라면 추출 도구, 어디서부터 읽으면 좋을까 — 카테고리 길잡이에서 전체 글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이 기사는 저작권자의 CC BY 4.0 라이선스를 따릅니다.